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1930년대 엄혹한 시기에 윤동주 시인이 속삭였던 '슬픈 천명'을 지닌 시인 김영랑이 삼백예순날 기다리던 그 '모란'이 피는 계절이다. 꽃 중의 꽃이라고도 일컫는 모란을 아는 우리나라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안다고 하면 모두 교과서에 실려있는 이 시를 통해서 시어로만 아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시인이 읊었던 이 시를 통해 볼 때, 모란은 그렇게 삼백예순날의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는 꽃일까? 봄이면 헤아릴 수 없는 꽃이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며 들녁에서, 집 밖 울타리에서, 집안의 정원에서 가득 피어나는데 말이다. 더욱이 봄 하면 순백의 자태를 수줍은 양 뽑내는 목련이 있지 않는가? 물론 목련의 죽음은 우리 인생과 닮아서 폭삭 말라서 죽어가지만 말이다. 또 하늘하늘 피어올라 그렇게 살포시 미소를 짓고 미풍에도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며 자신의 죽음까지도 잊지말라는 듯한 벚꽃도 있지 않는가? 여기에 추위를 견디면서 어느 꽃들보다 먼저 자태를 보여주는 동백꽃도 있지 않는가? 그 화려함은 모란에 비길만 하며 그 죽음도 처절하게 꽃봉우리를 떨구며, 한 이별한 연인이 저녁 어스름에 임을 잊지 못해 동구 밖에서 피눈물을 떨어뜨리며 기다리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를 체험하려면 3월 중순, 전라도 고창 선운사에 가보아야 한다. 그러면 실제 이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아니 시간이 없는 현대인이라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외치던 최영미 시인의 시 '선운사에서'를 보라. " 꽃이/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 이더군/... 중략..../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얼마나 처절한가?
그런데 시인 김영랑은 수 많은 꽃 중에서 모란인가? 심지어 고향이 전라도 강진인 시인에게는 봄이 시작될 때마다 모란보다는 동백꽃을 더 많이 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말이다.
작년과 달리 금년에는 모란이 집 앞 정원에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한번도 제대로 보지 않은 모란을 작년 여름부터 인지한 결과다. 작년 봄에 몇 송이만 핀 모란을 여름에 전정을 했다. 한번 풍성한 모란의 꽃을 보려는 희망때문이었다. 또 엄마가 좋아하던 꽃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꽃을 전정하며 내년에는 이를 통해 엄마를 볼 수 있다는 낭만적인 사념도 있었다.
올해는 봄에는 많은 꽃 봉우리를 달고 있었다. 그 모란꽃을 보며, 김영랑 시인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문득 떠올랐고 왜 그 시인은 모란을 기다렸을까? 그것도 울면서 말이다. 여기에 모란이 지면 왜 "그뿐, 내 한 해"는 간다고 했을까? 의문이 들었다.
모란꽃을 가까이서 멀리서 바라보며 알았다. 그것은? 이 사진 속에 다 담겨있지 않지만 그 실체를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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