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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독서

오펜하이머와 핵폭탄, 그리고 우리의 아픔

by 지적인 사과 2023.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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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가 개봉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하지만 이번 개봉되는 '오펜하이머'는 다른 이유에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2차 대전을 끝낼 수 있었던 인류 최고 혹은 최악의 무기인 '핵폭탄'을 만든 것은 미국이지만 그 무기를 만들게된 '맨하튼 계획'의 책임자 '오펜하이머'. 그의 주도 하 만들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은 20만 명에 이르는데, 이때 함께 희생된 식민지 조선의 희생자 2만 명이었다. 8월 9일 일본의 나가사키에 떨어진, '팻 맨'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 7만 4천 여명 중에 조선인 1만 여명이었다.  원자폭탄에 의한 일본인 피해자들도 안타깝지만 식민지인으로서 고향을 떠나 그 두 지역에서 강제징용으로 끌려 가 온갖 수모와 노동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수산의 장편 소설 '군함도'가 떠올랐다. 소설 '군함도'는 나가사키 해상에 있는 '하시마'라는 섬이 군함을 닮았다 하여 '군함도'로 불렸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일제 말에 강제 징용을 당해 '군함도'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조선인들의 모습과 함께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는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번 기회에 일본과의 역사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군함도'에 대해서 알 겸 이 소설을 한번쯤 읽어 봐야 하지 않을까?

1. ‘군함도와 잊혀진 아픔의 역사

 

군함도라고 불리는 나가사끼의 하시마섬은 나가사키현 노모반도 서쪽 18킬로미터에 위치해 있다. 이 섬에서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기부터 채탄하기위해 개발하였다. 1939년 이전에는 취업의 형태로 광부를 모집하여 채광을 했으나 그 후부터는 중국이나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채탄을 했다. 그곳은 오롯이 일제 말기 조선인들의 비극적 역사가 묻혀있는 공간인 것이다.

최근까지 이 섬은 철저하게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가 일본이 세계근대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우리에게 알려졌으며, 방송과 영화 군함도를 통해 국민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소설가 한수산은 그 이전시기인 1989년부터 강제징용과 피폭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 19931월 중알일보에 소설 해는 뜨고 해는 지고를 연재한다. 그러나 주변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2003년에 소설 까마귀(5)으로 출판하였다. 이를 다시 분량을 줄이고 개작하여 200912월 일본어판 군함도로 출간되었으나, 우리에게는 2016년에서의 한국어판 군함도로 출판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징용과 원폭를 다룬 이 소설들이 약 23년 간 주변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을 작가 개인의 사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근대 비극적 역사에 대해 부끄러운 역사로 취급하거나 무관심으로 대응해 온 우리들의 잘못도 작용한 것이다. 일제의 성노예 할머니에 대한 그간의 우리의 시선과 맞닿아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2. 소설 군함도에 드러난 민족의식의 형성

 

장편소설 군함도1943년 경부터 1945년 미국이 나가사끼에 원폭투하 후까지의 사건들이 조선의 춘천과 하시마섬, 그리고 나가사끼라는 공간의 변화와 얽히고설키면서 진행된다. 이 때문에 단순히 억압자로서의 일제의 모습만 아닌 타민족을 억압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일본인들의 의식과 행위도 함께 제시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본토의 일본인들이 지닌 나라 혹은 민족에 대한 의식과 이중적·삼중적 피해자인 조선인들의 나라 혹은 민족에 대한 의식의 형성과정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본토 일본인들의 의식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소학교 때부터 그들에게 꾸준히 주입한 의식이었다. 1972년부터 시작된 소학교의 의무교육은 18901030일 천황에 의해 발포된 교육칙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서구의 정치체제가 표방했던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국가에게 충성을 호소하는 문서로써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일본인들의 의식교육이 이뤄졌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국가의 의무교육이라기보다는 각 지역의 뜻이 있는 인사들에 의해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신학문을 배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 유신 일본닮아가고자 했으며, 1920년대 중등교육열기가 절정에 이르지만 중등교육은 오직 어느 정도의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으며, 교육을 받은 사람들 또한 사회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교육을 받은 지식계층과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일반서민 간의 나라 혹은 민족에 대한 의식의 격차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수산의 군함도는 양 민족의 나라 혹은 민족의식의 형성과 그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를 생생하게 묘파해 낸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2-1. 일제의 국가주도의 민족주의

일본의 본토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의식은 메이지 유신 때부터 시작된 교육에 의해 내셔널리즘으로 나타나는데, 군함도에서는 그 발현의 결과가 크게 두 형태로 나타난다.

대개의 일본인들은 국가 주도의 민족의식이 내재화되어 극단적 의식과 행동으로 발현된다. 국가 주도의 교육은 소학교부터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바다에 가면 물에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풀에 덮인 시체가 되리

천황의 곁에서 죽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인용문은 일제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바다에 가면>이라는 동요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조차도 동심을 키우는 노래가사이기 보다는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명예롭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내면화시켜 실생활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든다. 나가사끼 터널 공사장 주변에서 우석이 아이들에게 돌 세례를 받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어릴 적에 내재화된 민족의식은 성인이 된 후에는 내셔널리즘으로 바뀌는 이념화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지상을 도왔던 에가미 노인의 아들 코오이찌에게서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안데르센 동화를 좋아했고 토교제국대학에서 일본 예술사를 공부한 그는 순수한 성격을 지녔던 23살의 젊은이지만 한 몸을 바쳐 나라에 공헌하기 위해카미까제를 감행한다.

 

 에가미의 아들은 지금 이 국가가 하고 있는 행위를 생각했을까? 이것은 무엇인가. 침략전쟁이며 살육이다. 침략과 살육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하물며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살육을 위해 쓰여도 좋단 말인가. 거기에 무슨 정의로움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인용문은 아끼코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서술자의 목소리이자 지상의 생각이다.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나이와 지식을 지닌 코오이찌이지만 민족 혹은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 이성이 마비되고 맹목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지상의 사고는 고오이찌 같은 성인 일본인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무모한 행동으로 옮기게 만든 일본의 군부와 정치세력에 대한 통렬한 비난인 것이다.

1945년 전선이 확대되어 나가사끼에까지 미군의 폭격과 삐라를 통한 일본인들에 대한 회유 작전이 펼쳐진다. 이때 중일전쟁을 치르면서부터 나가사끼에 남은 일본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려왔던 그들을 일제는 나아가자! 일억이 불덩어리가 되어 가자!” 등의 표어를 거리 곳곳에 붙여 선전선동 한다.

 

전쟁에 지면 일본남자들은 전부 불알을 잘라낸 다음 노예로 만들고, 여자들은 공창 같은 데 수용해서 매음을 시킨다는 것은 다만 소문이 아니었다. 지난번 동네 주민회의에서는 사람들을 둘러 앉혀놓고 그런 공지사항을 줄줄이 읽어 내려갔다. 만약 천황폐하께서 우리 모두 함께 죽읍시다 한다면 그걸 마다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다 함께 따라 죽어야 하는 것. 그것이 일억총옥쇄다.

 

인용문은 일제가 퍼뜨린 소문이다. 이 소문은 전쟁을 독려하는 것으로 패배했을 때의 결과를 과장하여 국민들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한편 역으로는 맞서 싸워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개인의 나약함을 없애기 위한 방편으로 동네 주민회의를 열어 군중심리까지 교묘하게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실상 일제의 전쟁패배의 두려움은 그들이 지금까지 저질렀던 난징대학살과 조선삐’, ‘만삐라고 부르는 조선이나 만주 출신 여성들을 노예처럼 가두어 놓고 저질렀던 만행들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이다. 전쟁을 일으켰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그들이 교육을 통해 자국민까지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전략은 194589일 원폭이 떨어져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유효하게 작동한다. 원폭 후, 일본인 구조대들은 쓰러진 사람을 구조하러 왔다가도 조선인임을 인식한 다음에는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둔다든지 주먹밥을 나눠줄 때에도 조선인들에게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먹밥을 주지 않는다. 대피소에 피해있는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산속으로 숨어든 일본인들조차 지상과 같은 조선인이 그곳에 대피하려 하면 돌을 던지면서 쫒아버리는 행위로 나타난다. 이것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잘못을 전가하여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것들이 무슨 일만 나면 우물에 독을 풀고 그런다구.”라고 일본인 구조대의 대화가 이를 증명한다.

 

2-2 조선인의 자생적 민족의식

소설 군함도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은 식민지적 상황을 계층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긴다. 이것은 한 방대한 작가의 참고자료의 역할이기도 하겠지만 한국문학이 일제강점기를 순응과 저항으로 단순하게 이분화해 온 문제를 탈피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군함도는 일제 말 조선인들의 인식을 살펴보기 위해서 소설에 설정된 공간 - 춘천일대, 하시마섬, 나가사끼 - 중심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먼저 춘천은 식민지 조선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억압이 상존하고 식민지인들의 불만이 내재해 있지만 분출되지 않는 공간이다. 물론 과거 춘천고보의 학생들을 주축으로 비밀 결사운동을 벌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와해되었던 공간이다. 그 곳에는 일제말기에는 친일파들과 나라 잃은 울분을 지니고 사는 지식계층, 그리고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서민들이 공존한다. 친일파로는 지상의 아버지를 비롯한 형이 있다. 물론 그들은 지상이 징용에 끌려 간 후,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과거보다 약화되었다. 또한 서민층 중에 친일을 통해 팔자를 고친 소장수인 장갑수가 있는 데, 그의 아들 장경호는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경제는 일제의 노력으로 성장했다고 강변한다. 지상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 친일파들은 자신의 영달이나 집안의 번영이나 가족의 안락을 위해 하나의 민족이 뿌리부터 뽑혀나가는 데, 협조한 정당화될 수 없는 조선인일 뿐이다. 이에 반해 서형의 아버지 치규는 훈장으로서 대표적인 구시대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 태형이 간도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소식에 감격해 하지만 나라 잃은 비분강개만을 곱씹을 뿐 실천력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이 무력한 대응은 춘천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서민들과 다를 바 없다.

두 번째 공간은 일명 군함도라고 불리는 하시마섬이다. 이곳에서 채탄하는 조선의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섬으로의 이입인 경우와 일제에 의한 강제징용을 온 경우로 나뉜다. 자발적으로 들어온 경우는 탄광 일을 하며 돈을 벌려는 목적이 있는 반면,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온 조선인들은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놓인다. 따라서 이 강제징용 온 조선인들에게 군함도는 억압과 탄압, 고된 노동이 반복되는 지옥의 공간이다.

 

 왜 이 모양인가. 구순하게 넘기는 날이 하루도 없다. 그저 저 잘났네. 너 못났네. 쉴 날이 없이 조선사람끼리 아옹다옹이고 여차하면 여기저기서 투덕투덕 손찌검들이 오간다. 그뿐인가. 경상도는 경상도끼리, 평안도는 또 평안도라고 서로 편을 가른다. 웬수 잡것들. 그 꼴들이 보기 싫어서 혼자 떨어져 있으면 또 그걸 가지고 시비다. 자넨 뭐가 그렇게 잘나서 혼자 빙빙 도느냐 한다.

 

이 같이 고된 노동에 하루하루 목숨도 부지하기조차 힘든 지옥에서 서로 의지는 못할망정 서로 다투거나 지역별로 편을 가르고 싸움을 일삼는다. 또한 그들을 그곳으로 끌고 온 일제에 대한 저항은 고사하고 조선인 징용공의 일상을 일제의 탄광 관리원에게 알려줌으로써 자신만 안락을 추구하는 징용공도 존재한다. 물론 명국과 같은 예외적 인물도 있다. 그는 일본전역을 떠돌며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들어왔으나 들어올 때는 제 발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징용공들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의 동료들 중 몇몇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거나 다시 잡혀 돌아오기도 했다. 그는 노동자이지만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과 우석과 같은 지식인 계열에 속할 만큼 삶의 지혜도 지녔다.

 

()

형님, 지상이 형님, 나 고향에 가고 싶다구유! 나 좀 고향에 데려다줘유, 갔다가 다시 올 테니까 한번만 데려다줘유.”

고향, 성식이 말한 그 고향이라는 말이, 둘러서 있던 그들의 가슴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했다. 고향, 그래 너만이 아니다. 고향엘 가고 싶은 게 어찌 너뿐이겠느냐. 지상이 성식의 머리를 쓸어 안았다.

 

()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금화는 고향집과 술주정으로 날로 보내던 아버지와 그리고 매 맞는 것이 일이던 어머니를 떠 올렸다. 동생들도 이제는 다 큰 어른이 되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인용문 ()는 한 달에 50엔 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온 열다섯 살 먹은 성식이 술 한 잔을 마시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는 군함도의 조선인 술집작부인 금화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들의 고향은 가난하고 부모의 폭력이 가혹하게 이어진 기억으로 점철된 공간이지만 현재의 고통스런 시간을 잊을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조선은 고향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함께 고통받는 민족임을 서서히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다운 대접과 권리를 찾기 위해 반목하던 징용공들이 단합하여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따라서 군함도는 비극적 공간이지만 그 비극의 원인을 자생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공감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가사끼에는 일제의 하청을 받아 일을 하는 조선인 관리자 육손이와 길남이가 있다. 육손이는 조선인에 대해 우리 조선사람은 그게 잘 안돼 그저 뭐든 얼렁뚱당 대충대충 되는 대로란 말야. 차분하게 독을 쓰고 앉아서 끝을 보는 그런 맛이 없다고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군수 산업에 도움이 되는 터널 작업을 마침으로써 이익을 취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길남이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태복을 찾아 일본에 왔으나 육손이의 일을 도우며, 이익 취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밑에서 일하는 징용공들은 그들의 비극의 원인을 인식하고 일제의 군수산업이 숨겨질 터널을 폭파하려 한다. 그들이 부르는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메고/일제놈 쳐부숴 조국을 찾자라고 하는 노래가사에 힘을 합쳐 조국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따라서 식민지 서민층의 나라 혹은 민족에 대한 인식은 일제의 억압과 탄압의 강도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고 의식화된 것이다.

앞의 세 공간을 경유하면서 친일파 아버지 밑에서 식민지 현실을 외면해온 조선인에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식민 해방을 염원하는 조선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지상이 소설의 핵심 작의(作意)’라고 작가는 말했지만 그에 못지않은 인물이 우석도 있다. 이들은 춘천고보를 나온 인물들로서 독서회 사건에 연루되었던 경험이 있는 지식인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자의반 타의반 징용에 끌려가서 자신과 조선인들, 그리고 나라의 존재에 대해 성찰한다.

 

  이것이었구나. 나라가 없다는 것이 이런 거였구나. 지상은 처음으로 나라라는 말을 생각했다. 내놓으라면 그게 어디 곡식만이었나. 조상님 제사 모시던 유기그릇까지 다 꺼내주어야 했다. 가자고하니까 여기까지 끌려왔다. 그러고도 이제 또 서라면 서고, 때리면 맞아야 한다. 왜 우리가 이래야 하는가. 우리는 그 무엇에서도 주인이 아니다. 이제야 알겠다. 나라가 없다는 게 무엇인가를

 

인용문은 강제징용을 떠나는 열차에서 친일파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지상이 일제에 대해 깨닫는 모습이다. 징용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친일파 아버지 영향으로 풍요롭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일제하면 소학교 때의 단아하고 청초한 한 여선생을 떠올렸다. 그러나 조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고, 종국에는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까지도 강제징용으로 끌고 가는 일제의 참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이런 인식은 자연스럽게 자유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내 나라가 없어지면서 우리는 자유를 잃었다.”고까지 판단한다. 군함도 탈출의 정당성을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자유를 찾는 것이며, 이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나라의 광복이 필요함을 그는 인식한다. 따라서 지상의 탈출은 일제의 간교하게 숨긴 진실의 폭로이며,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행동인 동시에 나라를 찾겠다는 의지의 소산인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나, 자유다. 자유를 잃어버려서다. 이런저런 자유는 많고도 많다. 나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자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 선택의 자유다. 우리는 모든 선택권을 잃었다. 그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을 것인가.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 벌레도 못 되는 짐승만도 못한, 그게 우리들이다.

 

인용문은 또 다른 지식인 우석의 생각이다. 그 또한 지상과 같이 나라를 잃음으로써 선택의 자유가 없어졌고 그로 인해 조선 민족은 벌레보다 못한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군함도에서 징용공들과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폭동을 일으켰고, 나가사끼에서는 미군의 포격을 피하여 군수공장을 숨기기 위해 만들고 있는 터널공사장을 폭파하려 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터널공사는 일제에 동조하여 조선민족이 빼앗긴 자유 회복을 늦추는 이율배반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조선인들의 의식과 행위가 얽히고설키면서 반목하지만 조선인들, 특히 강제 징용공들에게는 갈등을 초월할 수 있는 공통적인 공간인 고향이 있었다. 그곳에 살 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군함도에서의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리라 이를 악물지만, 그 언제라는 때가 언제나 올 것인지 누구도 모르는 곳이다. 고향은 억압과 탄압, 그리고 고된 노동의 현실에서는 그리움의 공간으로 환기되며, 우리는 동포라는 인식으로 치환된다. 그러므로 대개의 일본인들이 지닌 내셔널리즘과는 달리 조선인들의 나라 혹은 민족의식은 타자에 의해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므로 타자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때에는 휴머니즘으로 전도되는 현상을 보인다. 다음 인용문은 원폭 피해를 돕고자하는 징용공들의 모습이다.

 

  원수네 집이라도 불이 나면 물동이 들고 달려가는 게 우리 조선 사람들이다. 나가사끼가 저 꼴이 됐다. 불바다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군대는 아직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고 철도도 다 끊겼다고 한다. 우리라도 내려가서 십시일반 도와야 하는게 아닌가. 앞으로 나선 지상이 들러선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3. 영화와 소설을 통한 생각의 한 단면

우리에게는 핵폭탄으로 말미암아 해방을 맞이 했고 이러저러한 곡절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자유와 평화를 누려왔다. 하지만 인류에게 핵폭탄은 끊임없이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핵폭탄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으면하고 소설 '군함도'를 통해 나가사끼에 끌려 갔던 우리 민족의 고통과 핵폭발 이후 보였던 우리 민족의 인류애를 다시 한번 느껴 보고, '민족', '민족주의' 그리고 '나라', '인류'에 대해 다시 한번 사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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