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서 땅거미 내려앉을 때까지 그 동안의 땀을 수확하는 농부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지난했던 농사의 여정이 발자국으로 깊게 찍히면서 기쁨이 그곳에 가득 깔려 갈 것을 믿는다. 허나 도시인들에게 이 때는 새해 첫날의 웅대한 목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한 해의 끝을 생각하며 그 무엇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몸은 허둥댈지 모른다. 그러나 목표에 한참 모자라면 어떠하랴.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한 흔적은 물론 내가 이렇게 다음의 목표를 세울 수 있도록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또 생활에서 느낀 소소한 계절의 향과 이 사회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며 자신의 고유의 향을 만들어 왔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으리라.
가을! 삶의 목표를 자본에 맞추어 살아가면서 성취감에 취하고 박탈감과 상실감에 좌절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로운 계절이었으면 한다. 누구나 추구하는 직선이 아닌 곡선의 상황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작가 알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인용한 “좁은 문(narrow gate)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7:13~14))을 깊게 고민하여 얻은 결론을 실행해 간 알리샤의 삶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제롬을 떠난 행동에 대해 그녀의 일기장에 쓴 사랑의 의미를 삶의 의미로 치환하여 되새겨 봄직하다
“사랑의 힘으로 우리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 그 이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면!”
가을!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집안이 고리대금업으로 성공한 졸부라는 사실에 부끄러워 자살을 여러 번 시도하다 39세의 짧은 생을 살다 간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년 6월 19일-1948년 6월 13일)의 단편집 『달려라 메로스』(민음사)를 소개한다. 오사무의 중기 단편집에 속하는 이 소설집은 짧은 단편들로 이뤄져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자투리 시간을 내서 읽어 볼만 한 서사로 이뤄져 있다. 대개의 서사가 오사무 개인의 삶을 소설화한 것을 비롯하여 어떤 삶이 향기 있는 삶인가를 설화나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생각하게 한다. 재미있는 서사들 중 두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단편소설 「벚나무와 마술피리」는 일찍 어머니를 여윈 두 자매와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첫째 딸의 시선을 통해서 서술되는 이 가족은 교사인 아버지의 직업에서 알 수 있듯 학자와 같은 품격을 지닌 완고한 아버지 성격과 직업에 따른 잦은 이사를 했기 때문인지 주변인들과의 교류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세상과 담쌓고 사는 가족이라고 할 만큼 쓸쓸하면서도 정갈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동생이 신장 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열여덟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동생이 죽기 몇 달 전, 동생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돼 온다. 사실 그 편지는 두 살 위인 언니가 죽어가는 동생을 기쁘게 해주려고 과거 여동생이 가족 몰래 사랑하고 결별했다고 생각되는 남성의 필체를 모사하여 보낸 편지였다. 하지만 그 편지를 받는 여동생은 그 편지를 보낸 남성을 모를뿐더러 언니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로 쓴 것임을 인지한다. 왜냐하면 여동생이 남성과 나누었다고 생각된 편지는 여동생이 만든 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언니, 그 초록 리본으로 묶어 놓은 편지를 본 거지? 그건, 거짓말. 난, 너무나 쓸쓸해서 지지난해 가을부터, 혼자 그런 편지를 써서, 나에게 부쳤던 것야. 언니, 멍청하다고 여기지 말아 줘. 청춘이란, 굉장히 소중한 거야. 난 병에 걸리고 나서, 그걸 똑똑히 알게 됐어. 혼자, 자기 앞으로 편지 따위를 쓰다니, 지저분해 바보야. 난, 정말로 남자분하고 대담하게 놀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몸을 꼬옥 안아 주길 바랐어, 언니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애인은커녕 다른 남자분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어. 언니도 그렇지? 언니, 우린 잘못한 거야”(25쪽)
그런데 언니가 쓴 편지 마지막에 저녁 6시에 집 밖 담장에서 휘파람을 불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저녁 6시가 되자 담장 밖에서 ‘군함 마치’의 휘파람이 들린다. 우연일까? 신의 장난일까? 오랜 뒤 그 일을 되돌아 보던 첫째 딸은 아마 그날 두 자매의 대화를 들은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을 위해 위해 담장 밖에서 휘파람을 부른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의 악취와 향
신문사 콩쿠르 당선작인 「황금 풍경」은 세월에 따라 변하는 인식, 그리고 인간관계의 한 면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는 서사이다. 집안이 부유해서 어릴 적 하녀가 나의 시중을 들었다. 그 여자 하인 중 ‘오케이’는 늘 느리고 실수투성이어서 매일 나의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때 나는 ‘무지하고 우둔한 사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재작년 집에서 쫓겨나기도하고 문필생활을 하면서 병도 얻게 되고 하여 휴양 차 지바현 바닷가의 작은 집을 빌려 자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호적조사를 나온 키 작은 순경이 나의 고향인 K라는 마을 사람이라고 하면서 나를 알아본다. 그러면서 그는 ‘오케이’에 대해서 말한다.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고 늘 나에 대해서 아내가 말했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오케이’에게 심한 첫 번째 굴욕감을 느낀다.
어느 날 뜻밖에 “아버지와 어머니, 빨간 옷을 차려입은 여자 아이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나를 찾아온다. 나는 놀란 나머지 약속 핑계를 대고 다음에 방문에 달라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집에서 나온다. 간단한 일을 보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 해변가의 평화로운 그림을 보게 된다.
“상당히,” 순경은 힘껏 힘주어 돌을 던지고, “똑똑해 보이는 분이던걸? 그 사람은 이제 곧 훌륭해질 거야.”
“그렇고말고요, 그렇고 말고요!”오케이의 자랑스러워하는 드높은 목소리다. “그분은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어요. 아랫사람도 정말 친절하게, 보살펴 주셨죠.”(16쪽)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느낀다. ‘졌다’고 그리고 “그들의 승리는, 또한 내일을 위한 나의 출발에도, 빛을 비춘다.”고 생각한다. 괴롭혔던 과거의 일을 ‘오케이’는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면서 내일은 또 다른 자신이 될 것임을 인지한다. 지속적으로 관계는 변한다. 그 변화하는 관계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향기로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 잔향은 그 멀리 날아가 미래의 향기로운 향으로 환기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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